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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저항하되 가해자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

[토론회] 여성의 방어행위는 범죄인가

56년 전, 성폭행을 시도하는 남성에게 저항하다가 혀를 깨물어 되려 가해자가 된 최말자 씨. 당시 재판부는 최 씨에게 "소리를 질러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길을 안내한 행동이 성폭력의 원인이 됐다"며 최 씨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상해죄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은 최 씨는 최근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최 씨와 같은 사례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수사·사법기관도 성폭력을 포함한 여성 대상 폭력 사건에서 여성의 방어권을 인정하는데 소극적이다.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수사·사법기관의 태도는 피해 여성으로 하여금 신고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2016년, A 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남성 B 씨와 술을 먹고 있었다. B 씨는 갑자기 돌변해 A 씨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며 A 씨의 얼굴을 때린 후 멱살을 잡고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다. 저항하던 A 씨는 B 씨의 혀를 깨물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B 씨가 난치의 장애를 입게 돼 정당방위의 범위를 넘었다"며 A 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C 씨는 남편인 D 씨에게 평소 가정폭력을 당해왔다. 사건 당시 D 씨는 C 씨의 핸드폰 검사를 구실로 C 씨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목을 졸랐다. C 씨는 D 씨의 팔을 물어 밀치고 "살려 달라"며 소리쳤다.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D 씨의 '쌍방폭력' 주장에 C 씨와 D 씨를 모두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했다. "재판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경찰의 말에 C 씨는 고소도 하지 못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여성 대상 폭력 사례 중 일부다. 한국여성의전화와 송옥주·정춘숙·윤미향 의원 등의 주최로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여성의 방어권 보장을 위한 정책 제안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성폭력·가정폭력 등 여성 대상 폭력에 피해자의 방어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24일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여성의 방어권 보장을 위한 정책 제안 토론회 '여성의 방어행위는 범죄인가'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돼야 한다"며 "피해자의 저항을 '쌍방폭행'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피해자가 신고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프레시안(조성은)

성폭력, 데이트폭력, 그리고 가정폭력

폭력 피해자의 방어행위가 '쌍방폭력'으로 처리돼 실제로 폭력 피해자가 처벌을 받게 하고 있다. 피해자가 구조 요청을 할 수 없고, 구조 요청을 했다가 더 큰 범죄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실질적으로 폭력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방어행위를 하면 물리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사·사법기관은 그러한 방어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성폭력 가해자를 건드리지 않되, 폭력 상황을 빠져나오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가정폭력의 심각성도 지적됐다. 가정폭력은 여성 대상 폭력 중에서도 '은밀하고 장시간 지속된다'는 특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되기는커녕 피해자의 정당방위가 단 한 번도 인정된 적이 없다는 게 한국여성의전화가 조사한 실태다.

최 팀장은 "벗어나기 쉽지 않은 가정폭력의 특성과 더불어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적이다"라고 지적했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도망가는 것도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거나 가해자가 자식들을 두고 협박을 하는 경우도 잦다. 결국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다. 그러나 현 사법부는 지속적인 폭력으로 아내를 사망에 이르게 한 남편은 '실수'로, 맞아 죽을거 같아 남편을 죽인 아내는 '고의'로 판단해 더 중하게 처벌하고 있다.

최 팀장은 이러한 판단 기준에 "가정폭력 가해자의 폭력을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여성 대상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성차별적 시스템'의 문제

여성 대상 폭력은 '여성이 자신의 소유물이고 통제의 대상'이라는 성차별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수사·사법당국은 여성 대상 폭력이 성차별적인 사고와 이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그저 '폭력성을 지닌 개인 남성에 의한 우연한 사고'라고 판단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각이 여성 피해자의 방어를 '쌍방폭행'으로 치부하며 폭력의 맥락을 삭제한다고 지적했다.

여성 피해자가 겪는 폭력의 두려움, 즉 섣부른 저항이 초래할지 모르는 위험, 목격자와 조력자의 부재 등 피해자가 당장 저항과 맞대응을 망설이는 현실이 쉽게 잊혀진다 것이다. 심지어 여성 피해자가 이러한 이유로 저항을 망설이는 행동이 '암묵적인 동의'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여성 대상 폭력을 둘러싼 정당방위 논쟁은 피해여성의 행동이 '여성의 경험을 알지 못하는' 남성들에 의해 판단되기 때문"이라며 "범죄 행동을 규정하고 처벌하는 권력을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젠더 권력과 성차별적 젠더 질서는 강화된다"고 분석했다.

허 조사관은 "미국의 주 공격자법(Primary Aggressor Laws)와 같은 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 공격자 법은 1985년 워싱턴 주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35개 주에서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가정폭력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선별해 가해자만을 체포하도록 하는 법이다.

그는 "지금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누군지는 분명하다"며 사법부의 전향적 태도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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